
그렇군요
찰리 커크, 누구인가?
우선 찰리커크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써보자.
찰리 커크(Charlie Kirk)는 미국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청년 활동가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터닝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라는 청년 보수 단체를 설립해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청년 보수 조직으로 키워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생전 인종 차별적, 여성 혐오적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발언들은 미국 사회의 진보 진영과 많은 시민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고, 그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늘 뜨거웠다.
사실 이는 미국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찰리커크의 피살로인해 붉어졌다.
찰리 커크를 둘러싼 논란은 사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현재 미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바로 극단적 정치 양극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미국은 지금 보수와 진보가 단순히 의견을 달리하는 수준을 넘어, 서로를 적대시하고 인간적 공감마저 거부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트럼프 시대를 거치며 이러한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고,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같은 사실조차 다르게 해석하는 상황이다.
커크의 죽음은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했다. 그는 대학 강연 중 총격을 당해 숨졌다. 한 사람의 생명이 이념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마저도 사람들은 이념의 잣대로 평가하고 있다.
최시원, 진서연, 최준용 등 연예인들이 커크를 추모하자 한국 사회도 논란에 휩싸였다. "왜 인종차별주의자를 추모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고, 일부 팬들은 최시원의 팀 탈퇴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최시원은 커크를 "그리스도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 한 사람의 남편"으로 추모했다. 그는 커크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강연 중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한 인간의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두 자녀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 남편이자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죽음 앞에서조차 이념을 따지게 됐을까? 생전의 행적이 논란이 있었다고 해서, 그의 죽음까지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추모조차 금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 논란이 보여주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공감 능력의 상실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을 '편'으로 나누고, 상대편에 속한 사람은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든, 그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였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물론 커크의 생전 발언들이 문제가 있었다면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인종차별과 여성혐오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그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일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지금 한국 사회도 미국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람을 재단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간적 공감조차 거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신호다.
집단 광기는 '정의'의 이름으로 시작된다.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그들의 인권까지 부정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비판하던 바로 그 모습이 되어버린다.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추모하는 행위를 비난하고, 그를 애도한 사람에게 사회적 제재를 가하려는 시도는 분명 집단 광기의 일면이다. 우리는 이념 이전에 인간이어야 한다.
최시원이 커크를 추모한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느낀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비난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비난과 증오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인간으로 존중하는 성숙함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만큼은 이념을 내려놓고 생명의 가치를 함께 애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성이다.